밤, 밤이 되었다. 해지는 바닷가를 보며 호텔방에 앉아있다가 홀린듯이 길을 나섰다. 지난번에 봐두었던 노스포인트 퀸즈카페에 갈까, 생각을 했더니 딱히 무거운 무엇이 먹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웬만한 차찬탱을 제외하고는 음식점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냥 근처 큰 마트에 가서 맥주를 사다 마셔야지-라고 정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호텔 문 밖을 나서자마자 훅-하고 폐부로 공기가 달려온다. 솥에서 물을 끓이고 있는 것 같이 축축하고 따뜻한 홍콩의 숨.
거긴 날씨가 어때? 며칠전 심심하던 찰나에 친구가 낮에 보낸 메시지. 서울은 하늘이 높고 바람이 쌀쌀해. 우와 너무 부럽다. 친구의 메시지를 보며 내가 4계절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기를 잠시동안, 바랐다. 봄과 가을을 드래그해서 길게 늘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년 아쉽고 아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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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바로 보이는 퍼시픽 커피에 들어가려는데 카페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더니 금새 손을 앞치마에 툭툭 털고 일어나 카페로 함께 들어갔다. 그는 직원이었는데, 그 날 저녁 몹시 고되보였다. 하지만 나에게 꽤 친절했다.
카운터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난생 처음 마셔보는 핑크 솔트라떼를 주문했다. - 언젠가 동대문 JW호텔의 BLT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했을 때 같이 나온 히말라야 핑크솔트를 기억한다. 이거랑 그거랑 같은 소금이냐. 스테이크와 함께 Glass Wine을 시켰었는데 영 상태가 별로여서 미간에 주름을 살포시 지어내고 있을 때, 귀신같이 알아채고 직원이 와서 새 와인으로 다시 바꿔주었었다. - 같은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커피가 나왔다는 부름에 창가 좌석으로 가져와서 핑크 솔트라떼를 마셨다. 소금맛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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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과 운동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홍대앞에서 만원주고 산 슬리퍼 하나로 산을 올랐고, 바닷가에 갔고, 배를 탔고, 비행기를 탔고, 미술관에 갔고, 시장엘 갔다. 발이 까져서 굳은살이 단단히 박히는지도 모르고. 종종 미련한 처사인가 싶어 신발을 사 신을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슬리퍼에 대한 배신 같았다. - 4개국을 나와 함께했잖아. 어떻게 네가 날 버리고 새 신을 살 수가 있어! - 그래서 슬리퍼에 대한 의리로 꿋꿋하게 신고 다녔다.
그리고 녀석은 이틀 전 신발장 정리 후 나를 떠나갔다. 그동안 고마웠어. 당분간 새 슬리퍼를 살 일이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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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밤은 생각보다 짧다. 바쁘게 흘러가는 도시의 밤은 여행자인 나같은 사람에게만 여백을 허락할 뿐이다. 사람들은 퇴근을 하며 책방에 들르고, 시장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일을 마무리하고 서둘러서 걸어간다. 오늘의 홍콩은, 오래전 내가 만났던 홍콩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 여기엔 스마트폰 대신 신문을 보며 여유를 부리던 홍콩 아저씨들이 없고, 내가 사랑했던 장국영도 없고, 매염방도 없고, 영어로 길을 물으면 수줍어하던 소녀들도 없고, Cantonese로 어설프게 질문하던 나에게 영어로 유창하게 대답해주시던 작은 사진관 할머니도 이젠 없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완차이를 향해서 자박자박 걸어갔다. 걸어가고, 걸어가고, 계속 걸어갔다. 아무 목적없이 아무 느낌없이 걷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호텔에 빈 손으로 들어가기 전에 맥주를 꼭 사야겠다. 맥주 맥주.
홍콩의 무더운 공기는 내가 완차이역에 다다를때까지, 여전히 뒤에 바짝 업혀서 따라왔다. @natsuta